회원 광장
나는 대한민국의 아나운서였다
김상근(전 KBS)
언론학 박사
(현)레토릭스피치 연구소장
KBS 아나운서(강릉/춘천)
KBS PD(교양국)
위성방송국장
호서대,나사렛대 교수
시청자미디어재단 이사장
“나는 대한민국의 아나운서였다”
지난 5월, 곤지암 이계진 한국아나운서클럽 회장 댁에서 있었던 봄 소풍 자리의 플래카드에 쓰여진 Copy다. 이계진 회장이 낸 아이디어로 본래 소풍 당일에는 ‘우리는 대한민국의 아나운서였다’로 쓰여져 있었는데, 그걸 아나운서 각 개인들을 주인공으로 하기 위해 여러 아나운서 중에 개개인이 돋보이도록 만들어 제작한 사진첩에는 ‘나는 대한민국의 아나운서였다’로 바꿔 주었다.
소풍 당일 그 Copy를 보는 순간,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우리 모두는 결코 아무나 할 수 없는 대한민국의 아나운서였다는 사실에 강력한 집단 자부심을 느끼며 우리 모두를 강한 연대감으로 묶어 주었다. 또 각 개개인을 주인공으로 만든 사진첩을 받았을 때 상단에 쓰여진 “나는 대한민국의 아나운서였다” Copy를 대하는 순간에는 내가 그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아나운서였다는 사실에 엄청난 자부심과 자존감을 갖도록 했다. 말이 곧 사람이요 힘이라 했던가? 몇 글자 안 되는 하나의 Copy가 이렇게 가슴 치는 요동으로 감동의 물결쳐 올 줄이야!
이계진 회장은 그날 참석한 아나운서클럽 전 회원 모두에게 각 개개인이 돋보이도록 만든 사진첩을 선물했다. 아마 이런 형태의 사진첩은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정말 기막히게 이색적이고 귀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이규항 전 아나운서 실장은 기존에 갖고 있던 가보家寶를 대체하지 않으면 안 될 귀하고 값진 선물이라고 했다.
나는 당초 아나운서였다. NAVER의 검색란에도 <데뷔 / 아나운서> 라고 적시돼 있다.
8년을 했으니, 사람의 성장기로 보면 아나운서는 30년 방송 생활 중 고향에 해당한다.
방송이 좋아서 휴일에도 방송국에 나와 일하는 것이 즐거웠다. 참 열심히 했던 아나운서 초기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강릉방송국 신입사원 시절, 최규락 국장과 함께
*1980년, KBS춘천 사옥 앞에서 이태수 카메라 감독과 함께
뉴스를 잘해 보려고 강릉에서는 잘 잡히지 않는 서울 동아방송 전영우 아나운서의 뉴스를 방송국 장비를 이용해 녹음해 다시 원고로 만들어 그대로 흉내를 내 해보기도 했고, 서울의 <우리는 고교생> 같은 프로그램을 하고 싶어 편성 과장을 졸라 <강원의 젊은이>를 만들어 방송했다. 또 야구 중계방송이 하고 싶어 초등학교 야구 경기를 하루 6시간씩 중계방송 했다. 물론 PD가 따로 있지 않고 내가 PD이면서 프로그램 제작자이자 진행자이고 캐스터였다.
강릉단오제 행사의 일환으로 벌어지는 ‘강릉상고’와 ‘강릉농공고’의 축구 경기를 중계방송하기 위해 매일 중얼중얼 연습을 하다가 출퇴근 때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들켜(?) “젊은 사람이 신수는 훤하게 생겼는데, 실성을 했다”면서 내가 묵고 있던 하숙집 아주머니에게 안타까움을 전하기도 했단다.
당시 강릉방송국에는 취재용으로 90CC 오토바이 1대가 배정되었다. 동해안 소식을 취재해 주길 원하는 본사의 요구에 따라 나는 나에게 전용으로 배정되다시피 한 그 오토바이를 타고 삼척, 묵호, 주문진, 양양, 속초, 고성 등을 누볐다. 본사와 취재 부서의 콜(call)만 떨어지면 섭외는 물론 취재, 녹음, 편집까지 일사천리로 해냈다. 당시 방송용으로 쓰이던 sony 카세트 녹음기를 90cc 오토바이에 달아매고 동해안 안 가본 곳이 없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내가 PD로 전직하여 새 프로그램 제조기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수많은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내가 아나운서 시절, 열정을 바쳐 일해 쌓았던 방송 제작 근육이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유명 소설가가 되기 위해 습작을 해가며 소설 작법 근육을 키운 것처럼 말이다.
나는 3,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아나운서가 되었다. 800대 1의 아나운서를 3번 떨어지고 4번 만에 합격을 했으니 말이다. 당시 1차 실기시험, 2차 필기시험, 그리고 3차 면접시험으로 전형이 이루어졌는데 나는 꼭 3차에서 떨어졌고, 그것도 수석(?) 낙방을 했다. 3번째 떨어졌을 때 모某 기관에서 KBS 아나운서에 합격되지 못한 불합격자 중에 제일 성적이 좋은 사람 하나를 채용하려고 하니 날 더러 그 기관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장황한 설명 대신 ‘수석 낙방首席 落榜’이라는 용어를 내 스스로 명명命名했다. 만약 내가 끝내 아나운서에 합격하지 못했더라면 “나는 대한민국의 아나운서였다” Copy 대신 “나는 대한민국의 아나운서가 될 뻔 했다”로 수석 낙방을 위안으로 삼았을 것이다.
*1978년, 용평스키장 취재
지금도 아나운서 합격 소식을 당시 KBS 제1라디오를 통해 듣고, 꿈인지 생시인지 몰라 했던 때가 생각난다. 1976년 2월 당시 나는 고등학교 국어 교사였다. 수업 시작이 됐는데도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벌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사각형 쏘니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낮 12시 '정오뉴스' 끝 무렵 “지금부터 KBS 공개 채용 아나운서 합격자 명단을 발표해 드리겠습니다.” 내 앞에 몇 명이 호명될 때마다 가슴이 벌렁벌렁, 드디어 “000 번 김상근” 소리를 들었다. '분명히 김상근이라고 했지? 내가 장기범, 임택근, 이광재 씨와 같은 KBS 아나운서가 됐단 말이지?!' 내가 나에게 묻고 확인하여 대답하며,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수업에 들어갔던 때가 지금으로부터 47년 전의 일이다.
'왜 아나운서가 되려고 했느냐'고 누가 묻는다. 당시 나는 무조건 아나운서가 돼야 했다. 이유가 없었다. 아나운서가 너무 멋졌다. 그래서 아나운서가 되면 너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늘 단정한 차림에 기품이 있고, 아는 게 많아 멋지게 말을 하고... 당시 대중이 생각하는 아나운서상像은 저널리스트로서 모르는 게 없고, 모든 언행이 모범적인 특출난 사람이었다. 모두가 선망하는 인기인이었다.
*가을맞이 가곡의 밤 행사를 마치고
*이산가족 상봉 인터뷰
나의 젊은 시절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아버지는 나를 법대에 넣으시려고 새벽에 일어나 목욕재계 하시고는 내 원서를 쓰셨다. 그러나 아버지의 간절한 소망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두 번씩이나 떨어졌고, 또 취직 시험도 보는 족족 떨어졌다. 그러나 끝내 나는 아나운서에 합격함으로써 그 앞의 모든 낙방의 실패를 한 방에 만회한 값진 인생의 승리자가 되었다. 내가 원하고 내가 좋아서,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던 아나운서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방송 KBS가 공식적으로 뽑은 대한민국의 아나운서가 된 것이다. 그때 합격의 영광과 기쁨은 나의 방송 생활 30여 년 내내 나의 자부심이었고, 평생 나를 꿋꿋이 지켜 준 자존감의 본체였다. 아무나 할 수 없고, 또 아무나 될 수 없는 아나운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나운서 8년 차에 PD로 전직하여 PD로서 차장, 부주간, 주간, 국장까지 오르게 되었고 <체험, 삶의 현장>, <TV는 사랑을 싣고> 등 수많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한 시대를 풍미한 명名 PD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PD로서의 영광과 명성을 안고 퇴직을 했다. 그런 내가 아나운서클럽에 나가 “나도 한때는 아나운서였소!” 하기가 퍽 겸연쩍었다. PD로서 누릴 영광 다 누렸으면서 22년이나 떠나 있던 고향 아나운서클럽에 불쑥 찾아가 내 지난날의 자부심을 추가하기 위해 숟가락 하나를 얹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치 '나 몰라라' 하고 고향을 등지고 떠난 정치인이 정치적인 필요에 따라 고향 팔이 하러 온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고향 아나운서클럽 사람들은 나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한때 같은 아나운서를 했다는 이유 하나로 ‘한번 아나운서는 영원한 아나운서’라며 아나운서라는 공동체 울타리로 감싸 주었고, 내가 아나운서 때에 누구보다 열심히 했고 아나운서를 자랑스러워 했던 모습을 지켜보았던 많은 선배들이 정말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김동건, 황인용, 최평웅, 이세진, 김규홍, 박영웅, 박용호, 김윤한, 정도영, 이종태, 전우벽, 이계진, 황 량, 김상준 선배로부터 윤성원, 이현우, 원종배, 김성수, 김성길, 조건진 등 후배 동료들, 그리고 박찬숙, 박민정 , 채영신, 이병혜, 배유선, 황인우, 신은경, 성연미, 오유경 등 여자 아나운서에 이르기까지 클럽의 많은 회원들은 오랜만에 겸연쩍은 모습으로 고향을 찾은 나에게 살갑게 다가와 ‘함께 아나운서 생활을 한 동료’로서 나를 대해 주었다. 특히 이규항 전 아나운서 실장께서는 내게 고진古眞이라는 아호雅號를 지어 주어, 아나운서 후배에게만 내려 주는 깊은 정의情意를 보내며 격려와 응원을 보내 주셨다.
“나는 대한민국의 아나운서였다”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말이 또 있을까?
어느 정신과 의사는 말하기를, 사람을 괴롭히는 요체는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요약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후회한다고 해서 과거가 고쳐지는 것이 아니니, 그 후회 속에서도 열심히 살아 온 자신에게 칭찬을 해줄 일을 찾아 자신을 끊임없이 칭찬해 주어야 한다고 했다. 특히 가장 자랑스럽게 여길 자신의 과거 일을 떠올리며 자신을 칭찬해 주는 것이야말로 지금 겪고 있는 우울과 무기력을 물리칠 수 있는 좋은 자산이라는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지금을 행복하게 사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늘 나를 이렇게 칭찬한다.
“나 김상근은 대한민국의 아나운서였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