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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인터뷰

줌인(Zoom-In)

“아나운서는‘한 가족’이라는 마음으로 뉴욕에서 날아왔습니다.”

봄소풍에 참가한 양승현 미주 회원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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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운서 클럽의 봄소풍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는 것은 봄의 푸릇한 정취 속에서 반가운  동료와 선후배를 만날수 있다는 기대가 가장 크기 때문일 것이다. 2024년 5월 2일 올해로 두 번째를 맞았던 봄소풍에는 그러한 기대가 더욱 커져서 거리가 멀더라도 오히려 그 길을 즐거움 삼아 많은 회원들이 적극적으로 참석해 아나운서클럽의 끈끈한 결속과 정을 다시 한번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중에는 오래전 이민이라는 결단으로 고국을 떠나서 한국에서의 아나운서직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던 양승현 아나운서가 있었다.

 
먼 땅 미국의 뉴욕에서 ‘ 한번 아나운서는 영원한 아나운서다 ’ 리는 명제와 귀소본능, 그리고 인터넷망 속에서 수없이 오가던 소소한 대화와 아나운서들간의 교류가 너무나 큰 교감으로 다가왔기에 오롯이 동료 아나운서들과 선후배 아나운서들을 아나운서클럽의 봄소풍에서 직접 만나겠다는 의지로 과감히 한국행 비행을 결심한 그였다.

 
인터뷰 전 전화로 먼저 인사를 드렸을 때 전화기 속 힘있고 청명하면서도 까랑까랑한 목소리는 옛 시절의 사진 속 이미지와 함께 단박에 ‘ 영락없는 아나운서 선배님이시구나!’라는 느낌을 들게 했다. 품격있는 말투에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절도 있는 어미 구사까지. 목소리만으로도 이미 만난 것같이 강렬함이 느껴졌다. 실제로 그를 만난것은 5월 2일 아나운서 봄소풍에서였다. 네이비 상의와 흰색 바지의 캐주얼한 모습에서는 품위를 잃지 않으면서도 경쾌함이 느껴졌고 선후배들을 만나 반가워하는 모습들로 주변이 들썩였다.

 
현장에서 이루어진 짧은 인터뷰, 전화와 메일을 통한 보충 인터뷰를 통해 양승현 미주 회원의 근황을 일인칭 시점으로 정리했다.

​윤지영 편집위원

보고 싶었습니다

 

아나운서 여러분, 감사합니다. 환대해주셔서. 이번 한국 방문은 개인적인 일정도 있었지만 2024 한국아나운서클럽의 봄소풍 참가가 주목적이었습니다. 한국행을 결정해 놓고도 5월 2일 봄소풍 날짜를 중심으로 체류 일정을 결정하기 어려워서, 만남의 기쁨보다도 내심 외로움과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변웅전, 김주혜 두 분의 선배와 동료였던 정연호 조석영 정영환 아나운서가 있었고, 또 1964년쯤 저에게 짜장면 한 그릇으로 배를 채워 주셨던 김규홍 아나운서에 대한 기억과 아직까지 연락이 닿는 여러분이 계셔서 체류 기간을 20일로 과감히 결정하고 저의 아나운서 직속 선배였던 김주혜 선배님께 이번 한국에서의 모든 것을 위탁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비행 14시간을 달려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 김주혜 아나운서 선배께서 원주에서부터 인천공항까지 달려와 가장 먼저 따듯하게 저의 손목을 잡아주셨습니다. 제가 봄소풍에 오겠다고 마음먹게 한 모든 이유들과 상상했던 그리움들에 대한 회포를 마음껏 푸는 느낌입니다. 기뻤습니다.


‘한번 아나운서는 영원한 아나운서, 우리는 한 가족’이란 말이 아나운서클럽 카톡 대화방에 뜬적이 있었습니다... 그걸 보고 선후배님들을 되도록 빠른 시일 안에 만나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겁니다. 51년 전 한국을 떠날 때 꼭 인사를 올리고 떠나야 했는데 ... 특히 이규항 선배님과 대면한 적이 없지만 이번 기회에 꼭 만나 인사하고 싶었고, 나의 직속 선배인 변웅전, 김주혜 선배님도 너무 보고 싶었습니다. MBC 동료들도 … TV 속에서 이름을 외일 정도로 유명한 선후배님들의 직접 만남도 봄소풍 참여 결심 동기이기도 합니다.

아나운서,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대학교 3학년 복학생 때 우연히 학우에 이끌려 당시 KBS 이성수 아나운서에게 기초 발성과 발음을 배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계기가 돼서 두 차례의 KBS 음성 테스트에 합격하고, 1965년에 당시 공보부가 시행하는 국가 공무원 시험도 다행히 통과해 아나운서가 되었습니다. 일단 지방으로 발령받아 초년병 아나운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KBS TV & RADIO 동기생들(정경래, 최평웅 등)은 모두 16명이었는데 끝까지 아나운서로 일생을 보낸 아나운서는 2명 정도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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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KBS 신입 아나운서 연수를 마치고(앞줄 왼쪽 3번째부터 이광재 아나운서실장 장기범 방송과장, 두 번째 줄 왼쪽에서 5번째가 양승현, 끝줄 오른쪽 끝이 최평웅 아나운서)

첫 발령지 KBS목포방송국에서는 아나운서, 기자, PD로 1인 3역을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데, 파월 비둘기 부대에 이어 맹호부대 파병 당시 전투가 한창일 때, 라디오 15분짜리 다큐멘터리 토크 쇼 <본 대로 들은 대로>에서 ‘파월 장병 무공담’으로 전국 지역방송 최우수 대상을 받은 일이 기억납니다. 거금의 상금을 받았고, 표창장을 목포방송국장실에 걸어 놓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이 평생 방송 프로그램 제작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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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목포방송국 시절, 뉴스를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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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11시 뉴스 진행 기사 사진 캡처

KBS대전방송국으로 옮긴 지 2년 만인 1968년 늦가을, KBS서울중앙방송국으로 발령받고 첫 출근 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아나운서실 나의 책상에 앉았습니다. 30분이 지나지 않아 장기범 국장님의 호출. MBC TV 개국을 앞두고 상업방송으로 가는 게 어떠냐는 말씀이었습니다. 바로 MBC 인사동으로 출근하게 됐습니다. 저에겐 일생일대 운명을 바꾼 큰 사건이 되었습니다. 대구MBC 지원 근무 기간을 거쳐 1968년부터 1973년까지 라디오 프로그램과 TV <11시 뉴스> 등의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아나운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 시절 같은 근무 팀 표기인  최·변·양·고(최정연, 변웅전, 양승현, 고흥칠)가 기억납니다.

미국으로 이민갔습니다

 

MBC에서 동료 아나운서들이 방송에 정진하고 있을 때 난 창 넘어 푸른 하늘을 보면서 속으로 다른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미국 이민을 준비하고 있었던 겁니다. 결국 1973년에 자동차 정비공으로 비자를 받고 가게 됐습니다. 한국에서 아나운서라는 최고의 엘리트 직업을 뒤로 하고 자동차 정비사 자격으로 미국에 간 저는 현지 미국인과 대화 자체가 어려워, 대화 없이 일할 수 있는 몇 개의 일거리 가운데 Shoes Repair shop을 인수해 20여 년의 신발 수리공이 됐습니다.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리고 부츠 수선 장치를 발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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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60년 전통의 신발 수리점 인수. 전 주인과 수리공 Helper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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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부츠 신장기 발명 특허 관련 현지 신문 기사

1979년 미국특허 발명품 US. Patant by YANG  ‘NEW 3-WAY BOOTH STRETCHER’였습니다. 그런데, 상품화하는 데에는 자금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던 중 이 상품의 주문생산 오더가 들어왔습니다. 현찰과 함께. 주문을 한 현지인은 Wholesale warehouse의 주인이었습니다. 그도 전직 Radio 방송 아나운서였습니다. 같은 아나운서 출신으로 신뢰할 만하다고 느꼈던 거 같습니다. 당시 현찰 $30,000 선지급은 제작 생산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제가 아나운서였기에 이민 사회에 불러일으킨 일화가 있습니다. 한국의 넥타이 부대 젊은이들도 가족들의 이민 물결 속에 같이 오던 때입니다. 고학력의 주부는 미국에서 막노동 일터로 나서는데, 막상 남편은 체면 때문에 집안에서 뒹굴고 있을 당시, 한국의 뉴스 앵커였던 제가 구두 수선공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 1978년 <주부생활> 미주판의 표지 인물 스토리에 실리면서 이민 온 한국인 가정에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고 가장에게 많은 용기를 주었다고 합니다.

 
8년간의 아나운서 훈련 경력은 미국에서 구두 수선업을 하면서도 나의 가슴속에 여전히 불씨로 살아 있었습니다. 아나운서처럼 잘생긴(?) 양승현 아나운서! 10만-20만-50만 명으로 교포가 늘어나면서 한인 방송사들도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투잡이지만 다시 아나운서가 됐습니다. 1974년 뉴욕 문화방송 라디오를 시작으로 한국 TV, 기독교방송, 대한TV 등 방송사들의 이름을 바꿔가며 2003년까지 뉴스와 특별 대담, MC, 94 US WORLD CUP 축구 중계방송 캐스터 등 한국에서는 감히 잡을 수 없었던 마이크를 잡고 방송을 했습니다. 행운이고 보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뉴욕의 한인 방송 역사가 저의 이력이 되었습니다. 저는 이력서에 방송국장, 보도국장이라는 직함과 함께 ‘아나운서 양승현’이라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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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대한TV' 앵커시절, 전 MBC 조명희 아나운서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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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V & RADIO SEOUL NY. 아침 뉴스 전망대 진행, 전 윤 김기경 아나운서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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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제1회 남북 영화제 사회

2003년 아나운서로 은퇴 후에는 부동산 Agent를 거쳐, 부동산 오피스 개설과 Agent를 고용할 수 있는 Broker 대표 자격증을 취득해 2010년까지 Owner Broker로도 활동을 했습니다. 부동산 직업을 수행하면서도 나의 이름은 ‘양 아나운서’였습니다. 믿고 맡길 수 있는 부동산 부로커 양승현 아나운서 말입니다.

아나운서는 역시 한 가족이었습니다

 

나도 한때 아나운서였다는 긍지가 아나운서클럽 봄소풍에서 더욱 빛난 것 같습니다. 반가운 분들과 인사를 나눴고, 분에 넘치는 환대를 받았습니다. 이계진 클럽 회장과 모든 회원들께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한 가족’ 대한민국 아나운서클럽의 무궁한 발전을 기대합니다. 아나운서 노래자랑  MC 왕서방(왕종근 아나운서) 말솜씨에 말려, 할 말을 다 하지 못하고 노래 한곡으로 대신 한 것은 못내 아쉬웠지만, 다음으로 기약하면서…노래 한 곡 즐겁게 불렀습니다.

 
출국 전날, 이규황 선배와 전화 통화가 극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김규홍 아나운서가 한 식구 같은 MBC 송별팀과 합류했었습니다. 김규홍 아나운서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이규항 선배님의 뉴욕의 양승현을 찾는 전화였습니다. 와~ 이런 일이 다~ 있어! 극적인 통화! 얼굴 인사만으로 만족했던 저에게 전화도 주시고, 더욱이 10여 분의 통화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KBS 남산으로 발령을 받고 한 가족이 될 수도 있었던 이규항 선배와의 만남, 나에겐 잊지 못할 순간이었습니다. 우리시대, KBS 하면 전설의 장기범 아나운서. 그 뒤를 이어받아 후배 양성에 힘을 쏟은 이규항 아나운서 아닙니까.


5월 6일 뉴욕행 081 대한항공 기내에서 승객의 직업을 잘 알아보는 여 승무원을 만났습니다. 이 승무원의 가벼운 실수로 나의 옷자락에 붉은 음료수를 떨어뜨려 물로 닦아주었지만 붉은 자국은 그대로. 죄송하다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승무원에게 내가 오히려 괜찮다고 말을 이었습니다. 나에게 특별 음식이며 음료수도 제안했습니다. 뉴욕 도착 무렵 또다시 찾아와 웃는 얼굴로 말을 걸었습니다. “혹시....선생님 ... 아나운서나 배우 아니세요?” 승무원이 승객을 보면 사람의 직업을 알아보는 것 같습니다. 잘생긴 아나운서 같은 아나운서가 된 기분! 즐거웠던 대한민국 아나운서클럽 2024년 봄소풍은 대한항공 여승무원이 마무리해 주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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