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별 인터뷰
줌인(Zoom-In)
“마이크 뒤에 숨겨둔 이야기”
최평웅 아나운서, 34년 동안의 비망록을 열다

1998년 6월 30일, KBS 제1라디오 정오 종합뉴스를 마지막으로 진행한 최평웅 아나운서. 정년 퇴임식을 2시간 앞두고 방송한 그의 뉴스는 여전히 경쾌하고 리듬 있는 아나운싱으로 진행되었다. 34년간의 외길 방송 인생을 차분하게 마무리하는 순간, 뉴스 센터 조정실 밖에서 대기하던 10여 명의 후배 아나운서들은 일제히 박수와 꽃다발로 축하했다. 눈물이 왈칵 솟았다고 한다. 그 눈물은 후배 사랑, 선배 존경의 전통을 확인하는 감격의 눈물이었을 것이다.
그날 이후 25년간의 인생 2막을 즐겁게 펼쳐가던 최평웅 선배 아나운서가 『마이크 뒤에 숨겨둔 이야기들』이란 책을 펴냈다. 공적인 모임은 물론 사적 모임에서조차 말을 아껴왔던 선배 아나운서의 비망록이기에 내용이 더 궁금했다. 그 이면의 이야기도 육성으로 직접 듣고 싶어, 지난 12월 11일 저자의 자택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악수를 청하는 80대 중반의 선배에게 인사차 말문을 열었다. “책을 단숨에 읽었습니다.”
“책을 읽고 실망하지 않았나 모르겠네요. 비망록에 담아 두었던 얘기를 그동안 틈틈이 다음 블로그에 올려 왔어요. 그런데 작년에 그 서비스가 중단됐어요. 방송 생활의 개인 기록이지만 역사적인 순간들도 있었고, 크고 작은 에피소드 속에 보람과 아픔, 허전함 같은 게 있어서 그대로 묻어두기에는 아쉬움이 남는 거예요. 그래서 몇몇 회원들의 의견도 듣고 도움도 받아 가며 책으로 내게 된 겁니다. 행여 이야기 속에 고락을 함께했던 선배, 동료 아나운서들에게 누를 끼칠 내용이 있지 않을까 걱정도 됩니다만, ‘남산의 추억’을 돌이켜 보면서 잠시나마 향수에 젖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요? 하하하.”

ROTC 1기 출신 육군 소위는 전역 다음 날, KBS 아나운서가 되어 방송을 시작했다. 1965년 6월 1일 “여기는 KBS 청주방송국입니다. HLKQ.” 떨리는 음성으로 시작한 첫 방송은 3년 뒤인 1968년 7월에 “잠시 후 4시가 되겠습니다. KBS 서울중앙방송국입니다. HLKA.” 긴장된 목소리의 서울중앙방송국 콜사인으로 이어졌다. 단 두 마디의 방송이지만 행여 실수라도 할까 봐 종이에 써서 읽어보고 또 외우고 했던 서울에서의 첫 방송이었다. 그렇게 시작되었던 34년간의 방송 인생은 대형 행사의 의식 중계와 배구 중계의 일인자로 꽃을 피운 뒤, 15년간 이어온 KBS 제1라디오 정오 뉴스로 보람있게 마무리 한 것이다.
*후배들의 축하 속에 마친 마지막 정오 뉴스
먼저 아나운서로서 자긍심을 느꼈던 일부터 여쭤보겠습니다. 김일성 사망 소식 특종에 큰 역할을 하셨다고요?
“1994년 7월 9일이었어요. 정오 뉴스를 위해 뉴스 센터에 갔는데 북한 중앙방송이 정오에 특별 발표를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어요. 편집 담당 데스크는 25일에 있을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측이 상투적인 조건을 내세워서 회담을 파기하려는 것 아니겠나며 큰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았어요.
내가 물었죠. 우리 정오 뉴스하고 시간이 같아서, 그들의 특별 발표를 속보로 내보낼 수도 있을 텐데 방안이 있냐고요. 대답을 못 하더군요. 그때 번개처럼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제가 사내 햄(HAM)으로 구성된 아마추어 무선국 동호회장이었거든요. KBS 신관 8층에 있는 무선국에 기자를 대기시켜 북한 방송을 듣고 있다가 전화로 리포트를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지요.
정오 시보와 함께 뉴스를 시작했습니다. 첫 기사가 끝날 무렵, 속보 기사가 들어 왔어요. 이럴 때는 일단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라고 멘트를 한 후 곁눈으로 속보 원고를 보는데 깜짝 놀랐어요.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오늘 새벽 사망했습니다. 자세한 소식은 속보가 들어오는 대로 계속 전해드리겠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속보를 전하고 다음 기사를 방송하는데 두 번째 속보가 들어왔어요.
‘방금 들어온 속보 자세히 전해드리겠습니다. KBS 아마추어 무선국에 나가 있는 기자를 연결하겠습니다. K기자 전해주세요.’ ‘네 북한 중앙방송은 조금 전 뉴스를 통해 김일성 주석이 어제 새벽 2시에 사망했다고 밝혔습니다.’ 세계 각국의 외신들은 KBS의 정오 뉴스를 인용해 서울발로 일제히 김일성 사망 소식을 타전했지요. KBS 아마추어 무선국의 도움으로 특종을 한 겁니다. 그 제안을 한 저로서는 아나운서로서 큰 자긍심과 보람을 느낀 역사적인 추억의 한 장면입니다.”
평소 차분하게 말을 하던 선배가 모처럼 흥겹게 약간은 흥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기 시작했다. 5.60년대 가난에 허덕이는 국민들에게 방송은 삶의 용기와 희망을 주는 친근한 벗이었고, 아나운서들은 다정한 목소리로 위안과 즐거움을 주는 방송국의 얼굴이었다고 회상하면서 보람도 컸지만 뜻밖에 터지는 방송 사고들과 숨겨진 비화의 이면에는 아픔과 아쉬움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도 ‘남산 시절’을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고 인간미 넘치는 사람 냄새가 나서 좋았다고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를 ‘알레그로’ 빠르기로 이어갔다.
“아날로그 시대 아나운서 세계의 위계질서는 대단했어요. 실장은 하늘 같은 존재이고 조장급 이하 층층이 있는 선배들의 지시는 군대에서 상관의 명령만큼이나 엄중한 것이었죠. 막내들은 선배의 뉴스 원고 챙기기와 모닝콜을 당연한 임무로 여겼습니다. 아나운서실의 전통인 형제애가 없었다면 견디기 힘든 환경이었다고 생각해요. 물론 명동 뒷골목에 있는 ‘송도’라는 대폿집이 근무 환경의 스트레스를 푸는 안식처 역할을 했지요. 그런데 총각 아나운서들은 술을 마시다가 통금 시간에 걸리면 ‘남산호텔’이라 불리는 숙직실로 올라오는 거예요. 막내에게는 새벽 뉴스가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말도 못 하고 끙끙댔지요. 저도 처음이자 마지막 실수를 그때 했습니다.”
방송 사고였군요. 매사에 정확한 선배님도 실수를 하셨네요
“새벽 5시 뉴스 방송 사고였습니다. 새벽 2시에 방송 종료 멘트를 하고 아나운서실에 가서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나니까 2시 30분이 넘었어요. 잠이 오지 않아 숙직실에서 뒤척이고 있는데 비몽사몽간에 어디선가 외마디 소리가 들려 왔어요. ‘아나운서∽!’ 뉴스 부스 엔지니어의 다급한 소리에 내의 바람으로 뛰어가는데, 벌써 방송 시작을 알리는 애국가가 울리고 있는 거예요. 단숨에 계단을 뛰어 내려가 뉴스 부스에 도착했는데 뉴스 원고를 안 가지고 간 겁니다. 다시 숙직실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한 후에 겨우 도착했는데 이미 비상 음악이 깔리고 있었죠.
시계를 보니 5시 1분. 숨을 헉헉거리며 겨우 나머지 4분 뉴스를 마쳤어요. 지방국으로 다시 갈 수도 있겠구나 하며 마음 졸이고 있었는데 다행히 윗분들의 배려 덕에 시말서를 쓰는 거로 마무리됐습니다. 그 사고 이후에 단 한 건의 방송 사고도 내지 않았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 이광재 실장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로마올림픽 중계방송단 시절 이광재 아나운서
최 선배는 이광재 실장이 아나운서들의 사기 진작과 복지 증진을 위해 노력한 사례와 애틋한 사연도 전해주었다. 1967년 어느 날 제주도를 아직 못 가봤다는 여자 아나운서의 얘기를 듣고 직접 섭외한 공군 비행기로 아나운서실 단체 여행을 주선한 일, 아나운서들이 박봉으로 시달리던 시절 육영수 여사의 격려금으로 매달 생계비를 지원한 일, 1969년 늦은 봄날에 해안 순시선을 타고 인천 팔미도로 전체 야유회를 다녀온 일 등이다. 당시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신생 민영 방송으로 떠난 후 실장으로서 아나운서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노력한 결과이리라.
아나운서 이광재에 대한 평가는 어땠을까. 민영 방송과의 경쟁 체제에서 이 실장은 정오 뉴스와 공개 방송, 스포츠 중계 등 중요한 방송을 도맡아 하며 라디오 시대 전설적인 아나운서로 자리매김했었다. 사실 6, 70대 청취자들은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기뻐해 주십시오!” 같은 리드미컬하고 가슴 벅찬 중계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의 방송에 대한 의욕과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1975년 어느 날 춘천에서 농구 중계를 오후 4시에 끝낸 뒤 군 경비행기를 타고 서울 장충체육관으로 와서 저녁 7시 ‘박치기왕 김일’ 선수와 일본의 ‘이노키’ 선수의 한일 프로 레슬링 경기를 중계 방송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열정이 방송을 혼자 다 한다는 일부 후배들의 불만으로 이어지기도 해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이른바 ‘파말마 사건’이었군요.
“1970년 어느 봄날이었어요. 비행기로, 해안 순시선으로 야유회를 다녀온 뒤에 새로 개통한 ‘관광호(후에 새마을호로 이름이 바뀜)’를 타고 계룡산 동학사로 아나운서실 야유회를 할 계획이었어요. 결혼한 사람은 부부 동반으로 참여하는 프로그램이었지요. 참가자들은 모두 서울역 ‘파발마(역 앞의 시계탑)’ 앞에 아침 7시까지 집합하라는 공고가 며칠 전부터 붙어 있었고요. 하루 전에 저는 야근조라 출근하면서 집사람에게 시계탑 앞에서 만자고 약속을 했어요. 실장으로부터는 당일 새벽 4시 반에 모닝콜을 하라고 미션도 받았고요.
그런데 출근하자 교대하는 한 선배가 ‘내일 서울역에 나가지 말아’라고 하더니 퇴근해버리는 겁니다. 야근조인 우리는 모두 황당했습니다. 일종의 ‘사보타주’였지요. 문제는 저의 미션이었습니다. 선배는 이 사실을 실장에게 절대 알리지 말라고 했으니 참 난감했습니다.
뜬눈으로 밤을 새고 몇 번이나 망설이다 새벽 4시 반에 전화를 걸었어요. ‘내일 이러저러해서 야유회 전원 안 가기로 했습니다. 야유회 취소하시지요’라고 사실 그대로 보고 하지 못하고 그냥 ‘4시 반입니다.’ ‘준비들은 다 됐나?’ ‘네’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마음은 착잡했고요. 결국 현장에는 서무를 맡고 있는 배덕환 선배와 신입 여자 아나운서 2명, 그리고 실장 내외만 나간 것입니다. 허탈해하는 현장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지요. 애써 섭외한 최신형의 특급 기차 관광호(새마을호로 이름을 바꿈)의 열차 한 칸, 실장 내외가 함께 준비했을 아침 식사, 대전방송국에 부탁해서 예약했던 동학사 인근 식당의 문제는 부수적인 일이었지요.
실장의 그동안 쌓아 올린 명성과 인기, 신뢰성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순간에 느꼈을 참담함과 배신감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합니다. 다음 날, 실장은 뜻밖에도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출근했고, 그 이후 50여 년이 지났지만 우리들 누구도 ‘파발마 사건’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었습니다.”
이광재 실장은 그 몇 달 후 ‘미국의 소리(VOA)’ 방송으로 떠나면서 ‘이광재 전성시대’는 막을 내렸다. 파견 기간이 끝난 뒤에도 복귀하지 않고 기독교 목회자로 사역하다가 2012년 8월 30일 향년 80세로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를 들었다고 한다. 최 선배는 이 증언을 하면서 연신 안타깝고 송구스런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고 목소리의 톤을 낮췄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새로운 질문을 드렸다.
책에 에피소드가 많이 소개 됐던데요?
“<넌, 마 왜 여태 안 자?>부터 할까요? B 아나운서가 숙직 근무 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C 아나운서가 아지트 ‘송도’에서 술을 마시다가 통금 시간에 걸리게 되자 근무 중인 동기 아나운서를 찾아 남산 청사 앞 등나무 그늘막 밑에서 술잔을 나누었다고 합니다. 새벽 2시가 다 돼 방송 종료 멘트를 하려고 B 아나운서가 일어나자 C 아나운서가 자기가 하겠다며 뛰어 들어가서 마이크 앞에 앉았는데, 조명을 받자 취기가 올라서 자신이 왜 거기에 앉아 있는지 잊어버리고 말았다죠. 방송실 밖에는 평소 친한 엔지니어가 앉아 있었고요.
엔지니어는 새벽 2시가 되자 평소처럼 ON AIR 큐를 주었는데, C 아나운서는 사인이 켜진 것을 모르고 대뜸 ‘넌 마 왜 여태 안 자고 앉아 있어?’ 시청자들에게 새벽 2시에 왜 안 자냐고 호통을 친 겁니다. 결국 그날 근무자인 B 아나운서는 지방으로 발령받아 내려갔고, 거기서 원 없이 방송 경험을 쌓고 서울로 복귀한 뒤에 민영 방송으로 스카웃 되어 갔지요. 전화위복인가요?”
“1970년 8월 지역 방송국 숙직 근무 아나운서의 일화입니다. M 아나운서가 밤 9시 로컬 뉴스를 마치고 종료 멘트 때까지 시간이 남아 바둑을 좋아하는 당직 K기자와 바둑을 두고 있었습니다. 마침 비번인 B 아나운서가 대국을 구경하다가 집으로 돌아가면서 종료 멘트를 자기가 넣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습니다. 바둑에 깊이 빠져 새벽이 됐는데, 조정실로부터 ‘아나운서!’하는 소리가 나서 본능적으로 스튜디오로 뛰어갔지요. 새벽 5시 방송 개시를 알리는 애국가나 울려 나오고 ON AIR 큐가 들어오자 ‘지금까지 여러분께서는 대한민국 OOO에서 보내드린 KBS OO방송을 들으셨습니다.’
엔지니어는 손을 내저으며 그게 아니라는 제스처를 했고요. M 아나운서는 다시 하라는 신호일 줄 알고 ‘지금까지 여러분께서는.... 오늘 방송을 마치겠습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하고 종료 멘트를 다시 힘주어 반복한 겁니다. 아뿔사! 개시 멘트 시간에 종료 멘트를 하다니. 청취자들의 항의 전화가 빗발쳤지요. 바둑에 정신이 빠져 후배가 종료 멘트를 하겠다고 한 것을 잊어버렸던 거지요.”
“하나만 더할까요? L 아나운서 얘깁니다. 밤 11시 뉴스가 끝나면 <남산의 메아리>라는 5분짜리 생방송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그날의 이슈를 다루는 논설 형식의 비중 있는 낭독 프로그램인데 하루는 담당인 L 아나운서가 원고 길이가 짧았는지 50초 정도 애드 립으로 시간을 메워야 해서 즉흥 멘트를 했습니다. ‘여러분 밤에 창문을 열어 놓고 자다가는 참변(?)을 당하기 쉽습니다.’ 한여름 밤 에어컨이 귀하던 시절, 부랑인들이 열어 논 창문으로 옷을 낚아채 달아나는 일이 빈번했는데, 그것을 섬뜻한 ‘참변’이란 어휘로 표현하다니... 이 일 후에 스튜디오에는 공익 스팟트 멘트가 비치되기 시작했지요.
1972년 8월 전국적으로 기록적인 대홍수가 났어요. 홍수경보가 발령되고 자칫 한강이 범람할 수도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현장에 급파된 L 아나운서, ‘여기는 제1한강교입니다. 지금 엄청나게 불어난 강물이 망망대해를 연상시키듯이 노도와 같이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 하늘도 노하고 땅도 노했나 봅니다.’ 3공화국 유신헌법 문제로 민심이 뒤숭숭할 때, 공무원 신분이었던 아나운서가 시국에 대한 저항이 담긴 듯한 표현을 했으니.”
지금은 웃으며 옛 얘기를 하지만,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제 얘기를 하지요. 역시 남산 시절입니다. TV 방송이 시작되면서 청사가 큰길을 사이에 두고 둘로 갈리게 됐습니다. 라디오 뉴스는 본관에서 했지요, 보도 기능은 TV 청사로 옮겨 갔고요. 당시에는 자막 입력 시스템이 안 돼 있을 때라 뉴스 할 때마다 자기의 명패를 들고 가서 테이블 앞에 놓고 방송했던 원시시대(?)였습니다. TV 뉴스를 끝내고 라디오 뉴스를 하기 위해 다시 뉴스 원고와 명패를 양손에 들고 길을 건너다가 뉴스 원고를 놓쳤습니다. 바람은 불지요. 신호가 바뀌어 차들이 휙휙 지나가니 원고가 차도 위로 흩어져 날아다니고 난리가 났습니다. 들고 있던 명패를 집어 던지고 원고부터 쓸어모았습니다.
다행히 운전자들이 차를 멈추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원고를 집어주어서 급한 불은 껐는데, 이 일대가 차량 정체 현상이 났지요. 사방에서 빵빵거리고. 정신없이 라디오뉴스 부스로 뛰어가니 뉴스 4분 전. 원고 순서 맞춰가면서 겨우 뉴스를 마쳤습니다. 십년감수한 느낌으로 식은땀을 닦으면서 주변을 보니 명패는 차 바퀴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어서 제 모습과 같이 엉망이 돼 있었어요. 허탈했습니다. 그래도 요즘은 명패를 들고 다니며 TV 뉴스를 하던 그때가 그립습니다.”

*자막 시스템이 도입되기 전, 명패를 놓고 TV 뉴스를 하던 시절
최 선배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담백하고 정갈한 삶의 궤적을 유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인터뷰 내내 비망록에 기록된 팩트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신경을 쓰며 당신만의 기준을 바탕으로 증언을 이어갔다. 새내기 시절 경험한 장기범 선배 아나운서의 인품, 실장으로 모셨던 이광재 아나운서에 대한 객관적 시선, 5·16 현장에 있었던 박종세 아나운서의 일화, 아나운서의 품격을 강조하는 이규항 아나운서의 방송 DNA 설명 등 선배 아나운서들을 회상할 때는 돌다리도 두드리는 듯한 조심성이 보였다.
동료 아나운서들에 대한 증언 역시 감성과 이성의 균형감을 유지했다. 이세진, 이정부, 김규홍 아나운서에 대한 따뜻한 접근은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고, 아나운서실의 삐에로 임건재 아나운서를 향한 애틋한 마음은 형제애를 바탕으로 한 진정성이 느껴졌다.
배구의 전성기에 배구 중계 캐스터의 계보를 이어 가셨지요?
“네,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가 배구의 전성기였지요. KBS 배구 캐스터는 원종관, 임문택에 이어서 제가 맡았고, 이어서 임건재, 유수호, 허주로 이어 갔습니다. 처음에는 망설였습니다. 제가 스포츠에 큰 관심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임문택 선배가 저를 반강제적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경기의 규칙과 중계 요령 등을 가르쳐 주고 녹음 지도도 해주었죠. 6개월 정도의 훈련기간을 거쳐 입문했습니다. 당시에 ‘백구의 대제전’이 창설되면서 중계 기회가 대폭 늘어났지요. 그때부터 20여 년 동안 돌아가신 오관영 해설자와 함께 방송을 많이 했습니다. 강만수, 장윤창, 김호철 같은 선수들이 맹활약하던 시기였지요.
그중에 1985년 바르셀로나에서 열렸던 세계선수권대회 예선전 경기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강호 불가리아와 본선 진출 마지막 티켓을 놓고 다투는 경기였는데, 세트스코어 2대2 상황에서 마지막 5세트 경기가 순조롭게 풀려서 12대 3까지 가는 거예요. ‘이제 큰 이변이 없는 한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하고 목청을 돋우었는데, 웬걸요. 계속 실점하더니 14대 16으로 패하고 말았습니다. 관중석의 교민들, 플로어의 선수들, 중계석의 방송진 모두 넋을 잃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바르셀로나의 눈물.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85년 배구 세계선수권 예선전 바르셀로나의 눈믈 현장
최 선배는 항상 뭔가를 해야 하는 성격이라 했다. 그러기에 현재까지 공백기가 없는 삶을 살아왔다고 했다. 34년 동안의 방송 인생을 끝내자마자 바로 전원생활을 시작하면서 인생 2막을 열었고, 전원생활과 함께 ROTC 동기가 제안한 공익사업도 시작했다. 젊은 음악인과 문인들의 발표 공간인 콘서트홀 ‘마루’의 운영 책임자로 일한 것이다. 10년 동안의 전원생활을 후에는 용인 수지로 이사해 빌딩 관리 책임자로 활동하는 등 바쁜 삶을 살다가 요즘은 일손을 다 내려놓고 여유 있는 인생 3막의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인생 2막도 바쁘게 사셨네요?
“그러게요. 집사람의 친구와 인연이 돼서 경기도 양평으로 이사하고 농사지으면서 한 10년 살았습니다. 첫해에는 텃밭 가꾸기로 시작했는데 이듬해부터 농사꾼 흉내를 냈습니다. 500평 규모였으니까요. 농촌진흥청의 유기농 교육 과정을 마치고 좀 전문적으로 하고 싶어서 욕심을 부렸지요. 초기에는 고생을 많이 했지만, 잡초와 전쟁도 치르면서 오히려 흙의 생명력을 느꼈어요. 그래서 그런지 정말 힘든지 모르고 농사를 지었습니다. 전원생활이라기보다 농촌 생활이 되었지요. 제가 좋아하고 건강도 좋아지니까 집사람도 마음을 잡고 정원도 가꾸고 취미 생활로 그림도 그리면서 적응해 나갔죠. 틈틈이 그린 작품들이 제 책에 수록돼 있습니다.”

*양평 벚꽃마을 전원주택
그런데 10년 만에 다시 도시 생활로 돌아오셨어요.
“집 주변이 경관이 좋아서 그런지 제가 사는 벚꽃마을에 팬션이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조용하던 마을이 팬션 단지가 되어버린 겁니다. 휴일이면 행락객이 동네를 누비고, 젊은이들이 MT를 와서 고성방가를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한적하게 살다가 힘이 달리면 다시 도시로 가려고 했는데 그 일정을 당겼지요. 친구와 같이하던 공익사업을 하느라 서울 출퇴근도 힘들었구요.”
인생 3막(?)은 어떻게 보내고 계신가요?
“50년 만에 일의 멍에를 벗고 나니까 좋던데요. 벌써 10년 전의 일입니다만 어느 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회사 생활을 정리했습니다. 깡마른 몸에 주름진 얼굴로 매일 회사 젊은이들을 대한다는 게 왠지 구차하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내 의지대로 생각하고 내 생각대로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내게 주어진 소중한 시간을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며 보내자고 결심했습니다.
그때부터 매일 새벽 6시에 두 시간 정도 헬스장에 가서 근력 운동하는 걸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ROTC 등산 모임도 꾸준히 나가고 친구도 만나고 집사람과 영화 구경도 하고 외식도 하면서 사니까 즐겁습니다. 지금은 농한기라 쉬고 있지만 100평 정도 되는 텃밭 일도 거뜬하게 해 냈습니다. 하루해가 언제 저무는지 모르겠습니다.”

*고대 ROTC 1기 등산모임인 ‘호산클럽’ 975회 산행
‘남산의 추억’으로 시작할 때의 속도는 ‘알레그로(Allegro, 빨리, 활발하게)’였는데 인생 3막의 삶을 얘기할 때는 ‘모데라토(Moderato, 중용의 속도)’였다. 상황에 따라 리듬과 톤, 빠르기를 조절하는 선배의 말하기는 34년 방송 인생의 자연스러운 결과인 것 같았다. 최 선배가 30여 년 전 배구 캐스터로 명성을 날리던 시절, 아나운서와 스포츠 PD로 일본 출장을 같이 갔던 일 외에는 개인적으로 깊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기에 모처럼 해후邂逅는 시종 즐거웠다. 친정 선후배가 만나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며 편하게 얘기한 이날의 아나운서 홈커밍데이 프로그램은 3시간 반 만에 마무리되었다.
대담: 김성길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