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말 우리글
우리말 우리글/한글날 칼럼

‘가갸날’(한글날)에 한글을 생각한다
이보길
(전) TBC 아나운서
(전) KBS 해설위원
한국방송신문협회 회장
대한언론인회 이사
「아아, 가갸날 참되고 어질고 아름다워요.
축일, 제일. 데이, 시즌, 이 위에 가갸날이 났어요.가갸날. 끝없는 바다에 쑥 솟아오르는 해처럼 힘 있고 빛나고 두렷한 가갸날.
데이보다 읽기 좋고 시즌보다 알기 쉬워요.
입으로 적꼭지를 물고 손으로 다른 적꼭지를 만지는 어여쁜 아기도 일러줄 수 있어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계집 사내도 아르켜 줄 수 있어요.
가갸로 말을 하고 글을 쓰셔요. 혀끝에서 물결이 솟고 붓 아래에 꽃이 피어요.」
(주: 원문 그대로 적음)
이 시는 시인이며 독립운동가로 ‘님의 침묵’으로 유명한 만해 한용운의 시 ‘가갸날’의 일부이다. ‘가갸날’은 ‘한글날’의 본디 이름이다. 일제강점기인 1926년, 민족주의 국어학자들의 단체인 ‘조선어 연구회’가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을 맞아 기념식을 열고 바로 그날을 "가갸날"로 정했는데 바로 이날이 한글날의 시초가 됐다. ‘가갸날’은 처음부터 10월 9일은 아니었고 광복 이후 양력 10월 9일로 정해졌다.
일제의 한글 탄압에도 불구하고 우리말을 지키려 한 국어학자들을 생각하니 요즘 인터넷과 각종 SNS를 통해 흔히 볼 수 있는 한글 파괴 현상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올해 한글날은 훈민정음 반포 577돌이고, 1926년 조선어학회 학자들이 '가갸날'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한글날을 기념하기 시작한 지 97돌이 되는 해다.
지금 한글과 우리말은 세계 무대에서 날로 성가를 드높이고 있다. BTS와 싸이의 노래를 따라 수억 명의 외국 젊은이들이 우리말로 노래와 춤을 즐기며, 최근엔 프랑스의 대학이 한국어를 제2 외국어로 채택하는가 하면 ‘세종학당’이 개설된 43개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한글 배우기 열풍이 뜨겁다. 그리고 볼리비아의 아이마라 족, 시베리아의 나나이 족, 인도네시아의 찌아찌아 족 등에 훈민정음을 전파했고 현재 찌아찌아 족은 한글을 공식적으로 쓰고 있다는 조선일보 특파원의 르포 기사가 전하고 있다.
언어학자들은 “소리와 글이 체계적으로 연결된 완벽한 문자”라며 한글의 우수성과 독창성, 과학성을 인정하고 있고, 심지어는 패션계를 중심으로 그 미적 가치까지 상품화하고 있다. 또한 예술계 특히 미술계에서도 이보석이란 여성 화가는 한글을 모티브로 한 작품을 세계에 내놓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막상 한글날을 맞아 우리를 뒤돌아보면 자부심보다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한글과 우리말이 정반대의 대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한글문화연대가 입법·사법·행정부 보도자료를 보면 한글 설명 없이 영어 약자만 쓰는 등 국어기본법을 위반한 사례가 만 건당 4.4회를 넘었다고 한다.
이를테면 ‘국회입법조사처(NARS)’ ‘자동출입국심사(SES)’ ‘국제군인스포츠위원회(CISM)’라고 써야 할 것을 그냥 ‘NARS’ ‘SES’ ‘CISM’이라고 표기한 것. 농협도 NH농협, 마을금고는 MG마을금고, 신협은 CU신협은행, 기업은행은 IBK기업은행, 하나은행은 KEB하나은행, LH(한국토지주택공사)라든가 kobaco(한국방송광고공사), aT(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 KORAIL(한국철도공사)처럼 기관명에 영문 약어를 앞뒤로 세운 지는 이미 오래다.
또 일상 대화나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비속어, 은어, 뜻을 알 수 없는 줄임 말, 국적 불명인 신조어가 범람하고 있고 간판이나 외식업체 메뉴판도 외국어투성이다. 한글을 쓰면 왠지 촌스럽다는 한글 경시 풍조가 원인이다. 젊은 세대로 갈수록 한글 경시 풍조는 더 심각하다.
과거 KBS 아나운서였던 김병래 씨는 최근 “어느 TV 방송에서 외국 유학생들이 한국말을 자유롭게 사용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방송했다. 그들의 한국어 구사는 오히려 한국인보다 유창하고 열의가 있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그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진행자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영어를 마구 남발해 주객이 바뀐 듯했다.”라며 울분을 토했다.
언어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외래어를 무조건 배척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겠지만 국가 기관과 공공 부문이 앞장서 국어를 경시하고 파괴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용인될 수 없다. 한글은 남북한, 재외동포 등 8,000만 명이 쓰는 세계 13위권 언어인데 ‘이렇게 훼손돼서야 우리 말과 글을 자손만대까지 잘 보존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상점에서 “커피 나오셨어요!” 등 사물에 극존칭을 쓰는 잘못된 화법, 병원에서 환자에게 쓰는 “이제 진료 받으실게요”“ 앉으실게요”라고 하는 간호사들의 말도 듣기 역겹다. 방송에 나온 정치인이 “저희 나라”라고 할 때는 같이 방송하면서도 그냥 넘어가는 아나운서나 기자도 초록은 동색이라 할 수 있다.
잘못된 언어 사용은 빨리 고치지 않으면 습관으로 굳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특히 방송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제라도 학교 현장과 가정에서부터 우리말과 우리글을 올바로 사용하는 교육이 강화돼야 한다. 우리말과 우리글은 한민족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귀한 세계 문화유산이다. 천대받아야 할 말과 글이 아니다. 한글날을 계기로 우리말과 우리글을 바르게 배워 바르게 사용하도록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