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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제공: Ilya Pavlov

회원 광장

차 문화 소고小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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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우벽(전 KBS)

 

CBS 아나운서실 차장

KBS 아나운서실 방송위원

(현) 한국차인연합회 부회장

(현) 대한언론인회 KJTV 방송위원

東洋三國(韓.中.日) 茶 歷史의 大綱

“人生은 앞을 향해 살아가야 하지만 삶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뒤돌아봐야 한다”(키르 케고르)

茶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수많은 이야기를 말해 줄 것이다. 하늘이 주신 茶를 인류가 이용하게 된 약 3000년의 變遷史, 人物史를 바탕으로 東洋三國의 綠茶文化(西洋은 커피와 紅茶文化)를 대강 살펴보기로 하겠다.

韓國의 茶 정신: 中正, 茶의 맛(味)을 중시한다.

(주: 중정,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고 적당해야만 차의 향과 맛이 좋고 차기(茶氣)도 온전히 전달된다는 의미)

먼저 高句麗(B.C.37-A.D.668)부터 살펴보면 705년간 28 國王의 역사인데 茶의 발상지인 대륙과 직접 맞닿는 지리적 이점으로 일찍부터 문화가 발달하였다. 옛 무덤에서 엽전 모양의 錢茶(가루내어 마시는 團茶)를 발견한 것과 영토를 넓힌 廣開土大王(391~412)의 웅비 등 고구려에서도 차가 널리 애용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新羅(B.C.57-A.D.935 /992년간 56國王)

기원후 유일한 천년왕국에서의 찬란한 문화는 세계인들과의 교역이 빈번했다는 것에서 짐작이 가지만 三國遺事나 三國史記 등 기록으로 봐서 562년 花郞들의 茶道具와 土産茶 등 곳곳에 유적이 남아 있으며, 元曉大師(617-686), 善德女王(632-676), 661년 삼국을 통일한 文武王, 764년 忠談禪師의 三花嶺에서 茶 올림과 景德王과의 茶 자리서 安民歌를 지어 바친 일, 828년 흥덕왕 때 김대렴이 唐나라에서 차씨를 가져와 雙溪寺 주위에 파종해 지금의 河東 野生茶로 차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駕洛國(A.D.42-532=491년)의 시조인 首露王의 왕후로 인도 阿踰陀國 공주 許黃玉(32-)이 茶씨를 가져왔다는 三國遺事를 바탕으로 (사)한국차인연합회에서는 우리나라 茶人 1號로 선정했으며, 17대 경세급간이 매년 술을 빚고 떡, 밥, 차, 과일 등을 갖추어 제사를 지냈다고 해 가락국에서의 차의 비중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김해 일대의 차밭에서는 名茶를 생산하고 있다.

百濟(B.C.18-A.D.660 /678년간 31國王)

고구려와 신라 백제도 일찍부터 차를 마셨는데 고대국가 중에서도 가장 먼저 문화가 발달하였던 나라로 백제인의 차 생활이 일본의 문헌(日本書紀, 東大寺要錄)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아쉽게도 漢城百濟의 차문화는 기록과 유적이 많지 않다. 그것은 백제의 茶가 일본에 전래되고, 학문, 예술 등 전반에 걸쳐 일본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여 일본이 역사를 지우고 없에는 바람에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소형 차확(茶確 돌절구) 등 茶道具를 사용한 흔적으로 보아 중국 남조시대 병차(餠茶 찻잎에 쌀풀을 끓여 혼합해 만든 떡차)를 주로 작은 절구에 넣고 갈아 마셨음을 알 수 있다.

高麗 (918-1392 /475년간 34國王)

상류계층의 차문화 전성기로서 飮茶王國으로 일컫기도 한다. 고려는 왕실의 차 문화가 중심 기능을 해 귀족문화였다. 고려의 대표 토산차로 腦原茶, 중국차로는 龍鳳茶, 建溪茗, 蠟茶 등이다. 왕실이 주관하는 燃燈會, 八關會 등 행사에서 왕이 직접 차를 갈아 공신이나 수행승에게 하사했다. 아울러 차의 이로움을 국가 제도에 활용 중대사를 처리할 때 차를 마시는 의례를 거행하여 맑고 안정된 상태에서 국사를 처리하려는 의지로써 지혜로운 차의 실용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민중의 약용과 제도적 차 문화의 의례적 기능이 수반된 것이다.

 

六法供養品으로, 국가 간의 貢物로, 接賓으로, 향연이나 의식에 반드시 차가 들어갔다. 소용된 차는 茶所, 茶村에서 재배하여 공납으로 징수한 것과 중국에서 받은 것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궁 안에서 茶房을 두어 茶와 과일, 술, 약의 일을 보게 하였다. 결국 점점 세속에도 퍼져 茶道, 行茶禮, 茶禮라는 명절의례와 風流茶로 변모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나아가 우아한 茶具를 갖는 풍속이 성행하면서 아름다운 高麗靑瓷에 이르게 된다. 이 시대 차인들로는 義天, 李仁老, 李奎報, 李穡, 李齊賢, 鄭夢周, 元天錫 등의 지식인이 차를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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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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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朝鮮 (1392-1910 /519년간 27國王)

조선시대는 한마디로 茶의 쇠퇴기다. 일부 文人이 차 문화의 중심에 있었다. 조선조는 유교사상을 바탕으로 성립된 국가로 초기에는 徐居正, 金時習, 金宗直, 李 穆 등에 의해 고려의 음차 유풍이 계승되었다. 고려에 청자라면 조선에는 백자와 粉靑沙器가 사용되었다. 임진왜란(1592-1598) 전후해 유린당한 강토에 차를 마실 겨를이 없는 상황에 丙子胡亂(1636) 등으로 조선 중기까지 점점 쇠퇴하다 차문화의 中興은 華嚴寺, 雙溪寺, 大興寺의 惠藏, 草衣, 梵海 등 茶僧들과 丁若鏞, 金正喜, 洪顯周, 李尙迪 등 차를 즐기는 문인들에 의해 선비들과 風流茶道를 만들었다. 1883년(고종 20)부터 農商司에서 차 재배를 관장하고, 1885년 청나라에서 차나무 모종 6000주를 수입하기도 했다.

 

한 말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차를 생산 보급했었다. 광주에 무등다원, 정읍에 소천다원, 보성에 보성다원 등이 조성된 것도 일본인들에 의해서였다. 1930년대부터 고등여학교와 여자전문학교에서 다도 교육을 시작해 1940년대 들어 47개 여자고등학교로 늘었다. 모두가 일본식 다도를 옮기려는 식민지교육의 일환이었다. 1960년대 전쟁의 상흔이 아물어가고 경제가 살아나면서 1970년대 후반부터 崔凡述, 許百鍊 등과 전국의 차인들이 모여 한국차인회(연합회)를 구성 조직하는 등 오늘날 茶人 천만시대를 바라보는 발전에 기여하였다.

中國의 茶 정신: 精行儉德, 茶의 향(香)을 중시한다.

(주: 정행검덕이란 차를 마시는 사람은 깨끗하고 단정한 행실, 검소한 생활과 덕스러운 성품을 추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보다 44배 크기의 대륙 국가인 중국은 茶의 발상지가 있어 차문화는 일찍이 안정적인 생산환경을 확보하며 대중적인 차 문화를 이어왔다.

三國志時代(A.D.206-280)

중국에 차 문화가 싹튼 것은 漢나라 때이고, 차 문화가 형성된 시기는 唐나라 때이며, 차 문화가 가장 발전된 시대는 宋나라 때이다. 또한 차문화가 가장 변화된 시기는 明나라 때이다. 唐 이전의 차는 모두 소금과 새앙을 썼다고 한다.

唐나라(618-907)

8세기까지 茶자가 없었다. 荼(씀바귀 도)-茶(차다{차} cha 씀바귀 차)로 통일했다. 대표적인 시인들로 李太白(701-762), 白居易(772-846), 盧仝(795-835)이 있다. 차에 관한 최초의 전문서적이며 지침서가 된 저술로 陸羽(733-804)가 48세 때인 780년 茶經 上中下 3권 10장을 완성했다. “德이 있는 사람이 마시기에 가장 적당한 것이 茶이다” 東洋古典이된 이 책은 20여년(761-780) 동안 준비해 수정에 수정을 거쳐 완성한 보람이 있어 茶聖이라 일컬어지며 1000년 이상 茶의 經典으로 위상을 누리고 있다. 이 책으로 약용이었던 茶를 기호음료로 바뀌며 대중화되는 과도기에 차 문화를 정립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는 점과 東洋三國에 정신 문화적인 음료라는 것을 환기시켜 많은 영향을 주었다. 중국의 茶 정신인 精行儉德도 이책의 영향이 크다.

宋나라(960-北宋-1127-南宋-1279): 茶具가 특히 발전한 시대

태조 조광윤과 인종, 신종도 모두 차를 좋아했는데 특히 徽宗(趙佶 1101-1135)은 茶藝에 정통하였다.(大觀茶論-20편에 點茶설명) 송나라는 봉건사회 발전의 최고 단계이자 물질문명과 정신문화가 최고조에 도달한 시기였다. = 우리의 高麗時代와 비슷하다.

 

元나라(1279-1368)

風趣와 茶藝는 간소화 소박해짐. 團茶(덩어리차)보다 잎차를 즐겨 散茶(가루차)가 유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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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육우陸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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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주원장

나라(1368-1644)

1368년(洪武元年) 태조 朱元璋이 明을 건국 후 1389년(홍무24년) 백성들의 노고를 덜고자 칙령으로 碾膏茶(맷돌에 갈아 끓여 마시는 차)인 龍團進貢을 폐지하는 역사적 용단으로 지금 우리가 쉽게 마실 수 있는 차 문화로 발전하게 되었다. 평민 출신의 주원장은 노비나 茶童이 수발하지 않으면 마실 수 없는 團茶와 餠茶를 끓여 바치는(煮茶法) 일을 금지 시킨 것이다. 주원장의 愛民精神이 덩이차와 떡차에서 잎차로 차 역사를 바꿔놓은 대변혁을 일으켜 오늘에 이른 것이다. 다구도 변모를 거쳐 1390년 景德鎭에 官窯가 설치된다. 1528 陸深이 지은 燕聞錄에 “차는 漢에서 처음, 茶經은 陸羽가 처음, 교다(?)는 張滂이 처음, 차의 이름은 爾雅의 檟(동자 榎)가 처음” 등 茶事를 기록했다. 張源(1573-1620)이 茶錄을 1595년쯤 지었는데, 지금까지 덖음차(炒菁綠茶) 제조의 교과서적 명저다. 이 책은 茶書全集에 실려 있고, 淸代의 萬寶全書(다경채요)에도 실려 있는데 조선의 草衣가 茶神傳으로 골라서 뽑아놓았다.

나라(1644-1911)

서구열강의 내침을 받아 국가 존망이 위급한 때. 지식층의 차 문화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다. 청말, 민국 초에 북경에 찻집이 생겨 사교 장소로 茶를 곡예, 시회, 연극 등 민간문화와 결합 특수한 차관문화를 형성했다. 왕실 貢物로 보이차를 썼다. 오늘날 보이차가 가끔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춤추는 현상은 1966년 모택동의 문화혁명 때 모두 불태움 당하는 수난 이후 벌어진 후유증이라 볼 수 있다. 이렇게 중국은 탄탄한 생산성을 기반으로 누구나 마시는 일상의 차로 발전했다.

日本의 茶 정신: 和敬淸寂, 茶의 색(色)을 중시한다.

(화경청적: 조화, 존경과 예의, 청결과 순수함, 고요함과 해탈의 가치)

나라 시대(710-794) 734년에 行基스님이 茶 나무를 심었다. 805년 사이초 스님이 茶種子를 809년 天台宗이 茶書와 茶器供給을 통해 일본에 차 문화가 전파했다. 1185-1333 가마쿠라시대 유학승에 의해 도입된 禪苑淸規라는 규범서는 일본 차 문화의 발전과정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최초의 차 관련 서적은 1211년 宋나라에 간 榮西의 喫茶養生記다. 이 책에 “차란 말세에 양생의 선약이며, 수명을 연장하는 묘술”이라고 했다. 抹茶法도 보급이 시작돼 주류가 된다. 1103년에 완성된 선원청규는 모두 10권인데 제5권이 각종 다례 의식에 관한 내용이다. 조선에서는 1111년 宋에서 간행된 책을 원본으로하여 1254년 다시 간행해 고려판 선원청규로 보존되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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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초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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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노리큐

14세기 초, 차 맛을 보고 産地를 맞추는 鬪茶 놀이가 보인다. 히가시야마시대(1493-1573)  에 서원차 문화가 확립되어 입식 다례를 좌식 다례로 변화시켰다. 1491-1568 전국시대에는 좌식 다례에 이어서 초암차 문화로 변한다. 본고장은 사카이(堺, 오사카 서부 무역항으로 센노리큐 고향)다. 화려하고 규모가 컸던 차와는 다른 시중산거라는 차노유 가옥(草庵)에서 엄격한 격식과 예법을 요구했다. 조용하고 한적한 정취에 잠기다는 와부라는 古語에서 나온 와비차=차노유=다도=초암차는 하나의 단어로 수행풍의 차문화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다. 결국 부를 추구하는 상인과 칼로 권력을 추구하는 무사, 무소유 해탈을 추구하는 선승이라는 세 계층의 지향이 결합되어 형성된 차문화가 바로 와비차이며 초암차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차 정신이라 하는 和敬淸寂은 와비 정신을 대표하는 말이다. 센노리큐(千利休)는 와비차 문화의 완성자이며 일본 다도를 확립해 茶聖으로 불린다. 오카쿠라 덴신(岡倉天心)은 茶의 책(1906년)에서 “茶道란 일상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해 이를 소중히 모시는 의식이다. 茶道는 동양적 민주주의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이다.”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茶道는 그릇으로 보는 道이고 더불어 사용하는 道라고 하면서 진정한 茶란 생활에서 아름다움을 맛보는 것이어야 한다.”라고 했다. 일본은 오랜 기간 전란을 겪으면서도 茶道는 센노리큐 이후 중단 없이 발전해 抹茶와 蒸茶 기술은 최고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이제 동양 삼국의 차 역사 대강을 마무리한다. 韓國은 계속 시달리는 환경에서 문인들 중심으로 교양과 취미의 선에 머물러 옛것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차의 질과 생산환경의 영세성으로 차 도구나 이론의 빈약성 등 차 문화 전반에 걸쳐 침체성을 드러냈다.

 

거기에 반해 中國은 안정적인 대량 생산환경과 대중적인 차 문화로 누구나 마시는 일상의 차로 발전했다. 또 日本은 상층 문화로서의 권위를 확립하면서 차 문화의 저변을 확대해 나갔다. 권력과 부의 상징으로 말차 다도가 자리를 잡고 조선에서 붙들어간 도공과 인쇄공(10만여명), 수탈해간 茶碗과 文化財들을 그들은 섬기고 아껴 자기 문화로 승화시켜나갔다.

 

한국은 빠르게 세계 무대를 주름잡기 시작하고 있으니 茶 文化에 있어서도 머지않아 따라잡게 되리라 기대해본다. 무엇보다 茶가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品位의 건강음료로서 우리 생활의 동반자로 자리매김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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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처: (사)한국아나운서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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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 이계진

편집인: 김성길

편집위원 : 이현우, 황인우, 유지현, 윤지영, 임병용

제   작: ㈜나셀프 마이온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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