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우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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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 한국어 발음과 一生을 함께한 所懷
이규항(李圭恒)
(전) KBS아나운서실장
2대 KBS 한국어 연구회장
1961년 국어학도가 말工場이라 불리는 KBS의 言語運士가 되었다. 머리로 배운 국어학을 36년간 몸으로 다시 배우게 되었다. 해방 이후 국어연구는 한글학회밖에 없던 시절, KBS 아나운서실의 校長格이셨던 張基範 아나운서(최초의 공개방송 스무고개 진행자)를 통해 ‘국어 사랑이 곧 나라 사랑’이라는 정신과 더불어 국어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하게 되었다.
漢文世代였던 장기범 아나운서는 家風에서 익힌 漢字의 韻을 국어의 長短音으로 연결시키면서 後輩들을 가르쳤다. 일명 ‘字高低’라 하였다. KBS 아나운서실은 한국어 音聲言語(Spoken Language)의 産室로, 第一期는 自覺期(1945~50)로 국어에 대한 先覺者的 사명감이 불타던 시기요, 第二期는 繼承期(1951~82)로 아나운서는 나랏말을 지키는 최후의 堡壘보루라는 자긍심을 갖던 시기이며, 第三期는 發展期(1983.4~ )로 아나운서실에 KBS 한국어연구회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국어학계의 元老와 重鎭들을 자문위원으로 모시고 象牙塔상아탑의 학문과 방송 현장의 언어가 産學協同의 정신으로 음성언어의 基盤을 다지게 되면서 방송언어가 新紀元을 맞이하게 되었다.
다음의 글들은 필자가 국어의 표준발음에 영향을 줄 수 있었던 몇 가지의 逸話일화들이다. 국어연구소(국립국어원 전신, 소장 金亨圭 박사)는 1985년 문교부로부터 외래어 용례집 발간사업을 위탁받아 외래어 심의위원회를 조직하였다. 필자는 심의위원(6명)의 한사람으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몇몇 표준발음에 異見을 보이면서 다른 위원들에게 나는 마치 異邦人이나 전투적 鬪士의 투쟁(?) 모습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그 까닭을 예로 들면, “Observer”를 “오브저버”로 결정하자고 했을 때 啞然失色 할 수밖에 없었는데, 우선 外來語는 話者와 聽者가 같은 言語圈이기 때문에 국어의 음운법칙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필자의 견해를 밝히면서 5명의 위원들에게 예를 들어가면서 그 이유를 밝혔다.
예를 들면, 聖經의 인물로 “Jone → 요한, Mattew → 마태오, Peter → 베드로, Paul → 바오로”처럼 외국에서도 우리나라의 姓氏인 ‘崔’를 미국 → 「초이」, 독일 → 「호이」, 프랑스 → 「쇼ㅏ」, 중국 → 「츄이」, 일본 → 「사이」로 각 나라의 音韻으로 읽는 外來語의 大原則을 밝혔다. 그리고 지금까지 잘못 발음되었던 ‘캐딜락(현 캐나다 → 카나다)’, ‘셔츠/샤쓰(복수 표기) 현 스포츠 → 스포쓰’, ‘점퍼/잠바(현 센터 → 쎈타)’ 등의 表記는 훗날의 典據전거를 위한 戰利品(?) 같은 事例들이라 할 수 있다.
결국은 나의 뜻대로 “옵서버/업저버紙(영국신문)”로 결정되었다. 이 무렵 현대자동차에서 新型 “소나타”가 출시되어 광고했을 때, 소비자들이 “소나 타는 車”를 “사람이 타라고 판매하느냐”고 거세게 항의하자 즉시 「쏘나타」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나에게는 千軍萬馬 같은 광고였다.
특히 방송에서 頻度數빈도수가 많은 “Sports”는 영어 발음에서조차 “스뽀쯔/쓰”에 가깝게 발음되며 「포츠」의 억지스러운 격음의 연음을 보였다. 事案 審議하던 시절, 쉬는 시간에 “가스, 버스, 배지(badge), 스포츠, 센터, 골대(goal post)”라고 실제로 발음했을 때 어색하지 않은지 어느 심의위원에게 물었을 때 싱겁게 웃던 기억이 난다.
몇 해 전, 국립국어원에서 「자장면/짜장면」을 복수 표기로 인정한다고 발표했을 때 현 외래어는 표기법이지 발음법이 아니며 硬音으로의 발음을 허용한다고 해야 하였다. 이 무렵 가장 힘든 사람은 필자와 같은 야구 캐스터였다. “피차, 캐차, 쎈타필다”는 日本式 발음이라고 罵倒매도하여 모순되게도 日本式 야구 용어인 投手, 捕手, 中堅手 등으로 바꾸었다. 어느 아나운서는 “쎈타 앞에 안타!” 했다가 惡夢이 떠올라 “센터 앞에 언터!”라고 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남해고속도로의 개통은 산업도로이자 영호남 和合 次元의 도로였다. 후자의 목표에는 뜻을 이루지 못한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조카사위였던 張德鎭 씨에게 ‘公職者는 公式席上에서의 표준발음 의무화’ 프로젝트를 지시하였다. 장덕진씨는 나의 대학 1년 선배로 어느 날 전화로 방문 요청을 받아 한국어연구회의 金上俊 박사와 함께 찾아간 적이 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逝去로 프로젝트가 霧散되고 말았다.
1990년 문교부 시절 서울대 李炫馥 교수가 중심이 되어 해방 후 최초로 국민학교 4·5·6학년 「말하기 듣기」 교과서를 만들 때 필자는 연구진으로 참여하였다. 필자는 문교부의 실무진에게 초등학교 교사 자신이 표준발음 교육을 받지 않은 세대이므로 敎師用 카세트 녹음테이프를 제작하자는 건의를 하였다. KBS 남녀 아나운서가 봉사 정신으로 참여하겠다고 하였으나 공무원들의 상투적인 예산 타령으로 실현될 수 없었다. 나의 豫見대로 「말하기 듣기」 교육은 몇 년이 못 되어 중단되고 말았다.
그 후 필자가 停年한 후 2006년 주식회사 敎學社의 李升九 부회장(대학동기)이 초등학교 2-1학기 교과서에서 6-2학기까지 교과서 10권의 발음부호 작업을 의뢰해 왔다. 이 자료집은 선생님들이 교육 현장에서 정확한 발음을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개발한 것이다. 이러한 實用 실무적인 발음자료집의 개발은 建國 後 최초의 일이다. 모든 작업이 끝난 후 敎學社 측에서 교육인적자원부의 김차진 의뢰인에게 전달하였으나 有耶無耶되고 말았다. 아직까지도 그 不可思議한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았다.
1987년 늦가을 필자는 한글 맞춤법과 표준어 개정 작업 당시 검토 조절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표준어는 교양있는 서울에 사는 사람이 쓰는 말’로 한다는 假說이 제시되었다. 그 무렵 서울에 사는 김영삼 정치인의 발언 “이(위)대한 강(광주)주 시민 여러분”으로 公職者의 표준발음 의무가 국민들에게 刻印되었던 時期 어느 심의위원의 지적으로 “서울말”로 바뀌었다.
문교부에서는 1988년 1월 19일 한글맞춤법 및 표준어 개정안을 告示하였다. 같은 해 다음 달 2월 17일 東亞日報 사회면 톱 記事 ‘표준어 교육 강화한다. 初中 교과서 개편에 반영 초등학교 중점 발음 정확하게’라는 꿈같은 記事가 나던 시절도 있었다.
무의식적인 日常 말투(Casual style)에서는 無視되다가도 조심성 있는 格式 말투(Formal style)에서는 표준어 指向的인 현상을 오늘날에도 公人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뮨헨 醫大 출신인 나의 친구가 최근 자신의 독일 同窓生으로부터 받은 문자를 보내주었다. “Guten tag(-Good day)은 Hanova 지역 언어가 표준어이다”라는 내용이었다. 老年의 독일 노인들의 표준어 사랑에 感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표준발음은 교통질서처럼 知覺 있는 국민이라면 따르게 되는 規範으로 先進 국민의 필수 조건임을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語文生活 202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