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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오유경
KBS 아나운서
K-wave 편집장
KBS에이브 대표
배우에서 화가로 변신한 ‘박신양’,
‘오유경TV’가 만나다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 사과를 하나 그렸다가 '이게 무슨 사과이냐'라고 선생님께 엄청 혼이 났던 아이. 아이는 자라서 연기를 전공하게 됩니다. 그는 운명의 힘에 이끌려 소련 붕괴 직후의 러시아로 유학을 떠납니다. 정치 사회 경제 모두 무척 혼란스러웠지만, 예술가들에게는 오직 예술을 진리로 추구할 수 있었던 순수의 시기, 그는 그곳에서 진한 우정을 나눈 친구와 진정한 배움을 준 스승을 만납니다.
귀국 후 탁월한 연기 실력과 스타성을 갖춘 배우로 각광 받던 그는 드라마 속 캐릭터로 강하게 인식되면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표현할 길 없는 허망한 관계들에 염증을 느낍니다.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나'로 존재하고 싶고, '나'를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쌓여만 갔습니다. 명배우로 각광 받을수록 그의 고뇌는 점점 더 깊어지고, 유학 시절 경험했던 진정한 만남들에 대한 그리움은 더욱 깊어지며, 결국은 밖으로 분출합니다. 그에게 그림 그리기는 마치 내면에서 뜨겁게 응축되어 있던 마그마가 폭발하듯 그렇게 폭발적으로 시작됩니다.
그는 자그마치 10년이라는 '강산이 변하는 세월' 동안 그리운 친구와 스승을 그리고, 자기 자신을 그리고, 자신이 추앙하는 사람들을 그립니다. 그리움을 그립니다.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에 무거운 짐을 진 당나귀가 떠오릅니다. 기왕이면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싶다는 구도자적인 생각을 합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한동안 영화와 드라마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배우 박신양입니다. 뱍신양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정말 다양한 캐릭터를 맡아 열연을 펼친 명배우였음을 새삼 실감합니다. 영화 '편지(1997년)', '약속(1998년)', '달마야 놀자(2001년)', '범죄의 재구성(2004년)', 드라마 '파리의 연인(2004년)', '쩐의 전쟁(2007년)', '바람의 화원(2008)', '싸인(2011년)', '동네변호사 조들호' (2016년, 2019년) 등 에서 완벽한 캐릭터 변신으로 극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은 물론, 흥행 보증 수표였죠. 그런 그가 4년 전부터는 아예 TV에서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박신양은 최근 평택에 있는 MM 아트센터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열고 지난 십 년간 그림을 그려왔다고 밝혀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MM 아트센터는 원래 자동차 부품인 철제를 다루던 공장으로 층고가 1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박스 모양의 건물입니다. 박신양 작가는 넓고 높은 공간에 무려 130여 점에 달하는 작품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웬만한 작가의 회고전 급 규모입니다. 게다가 작품 한 점 한 점의 크기도 커서 200호가 넘는 대형 작품도 많아 보였습니다. 그의 굵직한 스케일을 엿볼 수 있는 지점입니다.
그의 첫 개인전 전시 제목은 <제4의 벽>. '제4의 벽'은 원래 연극용어로 무대와 객석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관객은 제4의 벽을 통해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칩니다. 작가는 이 연극용어를 전시에 차용하면서 재미있는 시도를 합니다. MM아트센터 건물은 메자닌 구조(복층 형태의 단층 건물)라 2층에서 1층이 훤히 내려다보이는데요. 1층에서는 작가가 작업을 하고, 관객은 2층에서 작품을 관람하며 작가가 작업하는 1층을 내려다봅니다. 마치 연극무대처럼 미술관의 1층과 2층 사이에 제4의 벽을 설정한 겁니다. 전시 운영 기간에 작가는 1층에서 작업을 합니다. 자신이 배우였던 과거의 정체성을 끊어내는 것이 아니라 포용해서 화가로서의 박신양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죠. 그는 작가의 작업실에 방문하는 사람들이 진짜 박신양이 그리는 것이 맞냐고 하도 물어봐서 아예 보여주기로 했다며 웃었습니다.
평택의 MM 아트센터
그림을 배운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합니다. 그저 내면에 차오른 그리움 때문에 화방에 가서 화방 주인이 사라는 대로 주섬주섬 붓과 캔버스, 물감과 각종 화구를 사 들고 왔습니다. 그리고 캔버스에 러시아 친구 키릴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그게 첫 시작입니다.
이번에 전시된 130여 편에 달하는 그의 그림은 크게 세 가지 주제로 분류됩니다.
하나는 친구와 스승, 세계적인 무용수인 피나 바우쉬 , 투우사, 자화상 등 자신에게 특별한 의미로 각인되는 얼굴들입니다. 특히 피나 바우쉬(1940)는 무대 위의 혁명가라 불리는 독일의 현대 무용가로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난해하고 충격적인 무대를 창조한 예술가입니다. 박신양은 예술가로서 그녀의 치열함을 깊이 흠모하며 추앙의 의미로 그녀의 얼굴과 그녀의 춤 동작을 그렸습니다.
누군가를 사무치게 존경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대하 장편소설 <토지>를 쓴 박경리 작가님의 생애에 깊은 감명을 받은 나머지 살아생전에 단 한 번이라도 가까이서 뵙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며 깊이 사무쳤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피나 바우쉬에 대한 박신양 작가의 '그리움'에 크게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또 하나, 작가는 당나귀를 그립니다. 작가는 스스로를 당나귀 같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운명과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당나귀를 닮았다고 말합니다. 저도 당나귀 부류이겠구나 생각했습니다. 그가 특별히 남다른 것은 보통의 사람들은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어 하는데, 오히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싶다는 작가의 태도였습니다. 사람의 크기는 그 사람이 진 짐의 크기라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작가는 사과를 그립니다. 큰 캔버스를 사과 하나로 채웁니다. 나무판자 위에 그린 것 같기도 하고, 상처가 난 것 같기도 한 사과 같지 않은 사과. 거기에는 우리나라에 한평생을 헌신한 프랑스에서 온 두봉 주교와의 아름다운 일화가 있었습니다. 작가는 두봉 주교가 건넨 두 알의 사과에 담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고귀함을 그렸던 것입니다.
박신양 작가와의 인터뷰는 러닝타임만 80여 분에 이르며 1부와 2부로 나뉘어 오유경TV 아티스트토크에 업로드되었습니다. 유튜브 영상으로는 꽤 긴 편입니다. 조회수만 따진다면 박신양 배우의 변신에 초점을 맞추어 호기심을 자극하는 콘텐츠를 만들어야 했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제가 오유경TV를 하는 의미와 가치에 맞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말부터 오랫동안 준비해 오던 유튜브 채널, 오유경 TV ART & CULTURE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유튜브에 깊이 있는 아티스트 인터뷰가 너무 부족하다는 저의 갈증을 스스로 해결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방송인으로서의 업과 미술 애호가로서의 취미를 결합해서 아티스트 인터뷰를 시작했습니다. 좋은 아카이브를 만들자는 목적으로 대다수 인기 유튜버들이 추천하지 않는 방식으로 길고, 깊이 있고, 진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랬더니 두 번째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연 구본창 작가를 인터뷰할 수 있었고, 불과 세 번째 만에 박신양 작가를 인터뷰하게 되었습니다. 구독자가 4,000명도 채 안되는 오유경 TV의 진정성을 보고 연락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유튜브 세계에서 박신양 작가를 다룬 대표적인 콘텐츠가 유퀴즈와 오유경TV가 되었습니다.
아티스트 인터뷰는 한 달에 한 번 제작하고 있어요. 우리나라의 좋은 작가들과 작품을 깊이 있게 소개하는 창구로 꾸준히 역할을 해 나가겠습니다. 다음 인터뷰이는 누가 될지 궁금해집니다.
박신양 제4의 벽 전시는 평택 MM아트센터에서 4월30일까지 이어집니다.